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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리학을 전공해 졸업장까지 따긴 했지만, 솔직히 저로선 아주 어릴 적부터 줄곧 지망하며 진학을 꿈꾸던 학과는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그보다 훨씬 좋아하는 다른 과목이나 학문이 따로 있었고, 남들보다는 여행이나 이국의 문물에도 관심이 덜했던 편이었고요. 그럼에도 원하던 학과에 지원하기엔 수능 점수가 위태로웠을 때 다른 전공 대신 지리학과를 골라 선회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코에이가 제작한 역사 시뮬레이션인 ‘대항해시대 시리즈’였습니다. 4편으로 입문해 4 파워업키트를 거쳐 2, 외전, 3을 섭렵했던 저는, 게임을 통해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대해의 수평선을 넘는 로망을 느꼈고, 미지의 땅에 발을 디디며 새 터전을 일구는 즐거움을 알았습니다. 물론 교수님들께서 듣는다면 기겁하실 소리지만, 한낱 고등학생 생각엔 지리학과에서 가르치는 것들 또한 대략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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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4 with 파워업키트 HD Version |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제 기대를 대학에 개설된 지리학과에서 충족할 방법은, 15세기 말 즈음의 이베리아반도로 가는 것 이외엔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현시대의 지리학은 탐험과 개척에서 얻는 정보를 정리하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인간과 공간의 상호작용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심오한 학문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원망할 마음은 딱히 없습니다. 근대 시절 지리학의 피상적인 매력만이 그 게임에서 얻은 전부는 아니었으니까요. |
대항해시대 2를 해본 분들이라면, 이스탄불에서 사들인 융단을 아테네에 팔아 사치품 시세를 떨구고, 사치품으로 분류돼 헐값에 팔리는 아테네의 미술품을 사들여 이스탄불에 투하하는, 이른바 ‘아테네-이스탄불 루트’는 상식으로 알고 계실 것입니다. 초반 자금 마련을 위해 이 루트를 활용하다 보면 시세 변동과 무역의 기능을 자연스레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뭐 대단한 것이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 게임을 하던 제가 중학생에 불과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 연령대에서 이러한 경제 개념을 직접 보고 접하며 익힐 만한 기회는 그리 흔하진 않았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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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디까지나 게임인 만큼 비현실적인 면모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현실에선 이런 협상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대항해시대 2 |
2뿐 아니라 모든 시리즈에 걸치는 요소이긴 하지만, 각국의 주요 도시 위치와 해안선 형태를 대략이나마 익힐 수 있던 것도 상당한 수확이었습니다. 20세기 말 즈음엔 영어는 5형식까지만 통달했고 수학은 지수와 로그 너머를 아는 바가 없을지라도, 유독 사회과 부도만큼은 넝마 짝이었던 학생이 반마다 한둘씩은 꼭 있었죠. 자카르타는 모르는데 바타비아는 알고 있다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어디 붙은 나라인지는 몰라도 희망봉 위치는 정확하게 짚어내는 녀석도 간혹 볼 수 있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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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지만 웬만한 항구나 발견물의 위도와 경도를 아예 외우고 다니는 이도 몇몇은 있었습니다. 사실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성실하게 플레이하다 보면, 굳이 일부러 암기하려 들지 않아도 기억에 박히는 정보가 꽤 많긴 하지만요./대항해시대4 with 파워업키트 HD Version |
탐험과 발견이 주요 콘텐츠인 3을 플레이하다 보면, 발견물 좌표는 물론 실제 역사상 대항해시대 시절 주요 탐험가와 그의 행적까지 꿰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세계 각지를 누비며 명성을 떨쳤던 인물들이 플레이어의 경쟁자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어야 발견물과 업적을 탈취할 수 있거든요. 현지 표기→일본어 번역→국문 표기에 이르는 중역(重譯) 때문에 성명이 좀 이상하게 왜곡되는 일도 있었고, 경쟁 난이도 조절을 위해 생몰년이나 활약 시점이 약간 바꾼 인물도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을 큰 맥락에서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3을 플레이하다 보면 자연스레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가마가 유럽인 최초로 유럽-인도 직항로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며, 아즈텍 제국을 공격한 스페인의 콩기스타도르는 에르난 코르테스임을 기억하게 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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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3에서 스페인식 이름인 ‘크리스트발 코론’으로 등장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다만 고전 게임이다 보니 대항해시대 즈음에도 지구평면설이 대세였다 추정한 ‘플랫 에러’를 반영한 문제가 있긴 합니다./대항해시대 3 |
사실 어지간한 내용은 학교 수업이나 교양서적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는 것들이긴 합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을 그저 말이나 글로만 마주하는 것보다야, 게임 속에서 내가 공들여 추진 중이던 인도 발견이나 아즈텍 정복 업적을 그들에게 뺏겨보는 편이 오히려 훨씬 더 기억에 남기기 쉽겠죠. |
물론 대항해시대 시리즈를 비롯해 게임 대부분은 교과서를 완전히 대체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나 재미를 위한 연출 등을 이유로 현실과는 차이가 나도록 손을 보는 부분이 상당하니까요. 이른바 ‘게임적 허용’이라는 것이죠.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도 실제로는 사거리가 짧은 대포였던 ‘카로네이드 포’가 사정거리와 위력 모두가 우수한 무기로 나온다거나,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선원을 해고할 수 있다거나, 19세기에 나온 윈드재머 범선이나 돼야 다다를 수 있었던 속도인 시속 20노트(약 37km/h)를 15~16세기부터 기록하는 등 현실성을 무시하거나 포기한 요소가 적지 않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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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선 아직 원양항해가 가능한 규모의 선박과 맞대결을 벌일 정도로 강력한 오징어는 발견된 바가 없습니다./대항해시대 3 |
그럼에도 게임 요소 중 현실성이 높은 부분만을 신중하게 추려낸다면, 정보와 흥미를 겸비한 교보재로 활용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웬만한 정규 수업 커리큘럼을 뛰어넘는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고요. 지난 2009년 기업가 정신 육성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비영리재단인 ‘카우프만 재단(Kauffman Foundation)이 발표한 ‘비디오 게임: 대규모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rmatics) 교육 루트?(Video games: A route to large-scale STEM education?)’ 논문에 따르면, 우수한 강사가 제공하는 강의는 학습 효과를 불과 17% 높인 반면, 수업 내용을 아예 게임으로 바꾼 이후로는 학습 효과가 108% 증가했다 합니다. 고등 교육 기관에서 게임을 활용하는 사례도 꽤 있습니다. 지난 2월 토레 올슨 미국 테네시대 역사학과 교수는 1899년부터 1911년 사이 미국의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독점자본주의 등을 설명하는 교재로 미국 서부개척시대 무법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락스타게임즈의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채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난 2019년 8월엔 독일 바우하우스대 교수인 우베 아놀드가 ‘심시티를 활용한 공공 기반 시설 관리 교육(SimCity in Infrastructure Management Education)’을 제목으로 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논문에서 다룬 ‘심시티 4’는 맥시스사가 지난 2003년에 내놓은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현재까지도 동종 장르 게임 내 최고 명작 중 하나로 꼽히죠. 아놀드 교수는 “게임은 안전하게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도시공학) 시스템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다”며 “출시된 지 15년이 지난 게임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흥미진진한 학습을 위한 플랫폼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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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감히 비디오 게임은 교실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는가?”/토레 올슨 미국 테네시대 역사학과 교수 트위터 |
그러니 혹시나 게임을 독성물질에 가깝게 취급하던 20여 년 전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게임에 손대기를 꺼리는 분이 계신다면, 조금은 마음의 문을 열고 잠깐이나마 게임 패드를 쥐어 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사고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 삶의 만족도까지 향상될지도 모르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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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국력과 인구, 자원, 병력의 상관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해 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세가에서 발매한 ‘토탈 워: 삼국’에서 원소와 맞서 보시길 추천합니다./토탈 워: 삼국 |
실제로 지난 3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문화기술대학원 도영임 초빙교수가 50~60대 중장년층 19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을 진행한 결과 다른 사람과 함께 디지털 게임을 하는 그룹의 웰빙지수와 사회적 지지 만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게임을 혼자 하는 그룹마저도 전혀 하지 않는 그룹보다 사회적 지지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연구팀은 “중장년층에게도 게임이 줄 수 있는 효용 가치와 혜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직접 플레이로 경험할 수 있게 도우면서 게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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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문화기술대학원 |
/사람인 HR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