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자소서 3건

합격자소서 경영지원

2013년 하반기 SBS 합격자 자기소개서 02

Q1 입사지원 동기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주십시오. (본인의 차별화된 장점과 그 동안의 준비과정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30 ~ 1,000자 이내]
A1
평소 방송국에 근무했으면 하는 열망에도 불구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저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준 사람은 같은 과 1년 후배였습니다. 바로 작년, 유수한 TV방송국에 경영지원 분야로 응시하여 합격했다는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의 열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오랜 설레임을 현실화하고자 벅찬 마음과 힘찬 용기로 SBS의 문을 두드리고자 합니다.

재수의 시련을 딛고 선망의 대상인 경영학과에 입학한 후 학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클라리넷 단원으로 활동하며 느꼈던 강렬한 경험은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네 차례의 크고 작은 공연준비에 몰입하면서 50여 명의 단원들과 함께 전율했던 초월적 융합의 순간들, 또한 관중들과 진지하게 호흡하며 느꼈던 공존의 세계를 통해 새로운 의식세계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으며, 내부에 충만하게 도사리고 있던 저의 인문학적 성향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다양한 독서와 수많은 공연관람 등을 통해 사고의 폭을 넓혀 갔는데, 돌이켜보면 이러한 다양한 경험의 축적은 결국 창의적 사고와 지적 통찰력을 키워주는 도구가 되었으며, 아울러 사물을 깊이 있게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디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기 때문에 올바른 가치관으로 시청자들에게 유익한 방송을 제공하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흠뻑 빠져들 수 있는 SBS라는 조직에서 시청자에게 보탬이 되고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뜻 깊은 일을 꼭 하고 싶습니다. 흔히 방송사 취업은 언론고시라고 불리울 만큼 우수한 사람들이 열망하는 어려운 과정이라고 합니다. 저는 경영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방송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은 부족하더라도, 인문학적 소양으로 단련된 통찰력과 방송분야에 대한 열정 등 풍부한 잠재력을 경영지원 분야에서 열심히 발휘하겠습니다. 안되면 도전한다는 각오가 있기에 입사 후 피그말리온 효과를 100% 이상 창출하는 훌륭한 SBS맨이 반드시 되겠습니다.
Q2 자신에게 주어졌던 일 중 가장 도전적이고, 어렵다고 느껴졌던 경험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 (일의 배경, 그때 느꼈던 감정, 어려웠던 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행동,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30 ~ 1,000자 이내]
A1
[지식 이상의 가치를 이루기 위하여]

군제대 후 2년 동안 활동한 학술동아리 IFS는 다양한 삶의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던 대학생활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저는 IFS에서 폭넓은 금융 및 경영이론을 다루는 커리큘럼을 학습해가며 기업의 가치 있는 일원이 되기 위한 토대를 쌓을 수 있었으며, 끈끈한 조직력을 갖춘 우수한 구성원들과 의기투합하고 때로는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팀워크 능력을 함양하는 등 단순한 지식 그 이상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학회 가운데서도 높은 몰입을 요구하는 조직으로 정평이 나 있는 IFS에서 저는, 주간 경제동향, 우량기업 경영전략사례 등을 탐구하며 실전적 감각을 배양함과 동시에 2년에 걸쳐 국제학술세미나(GPAC)에 참석하면서 글로벌 감각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고학번이었던 만큼 학회에 무한한 애정을 쏟으며 항상 솔선하고자 노력하였는데, 열정을 바쳐 매진하였던 활동 가운데 가장 보람을 느끼고 있는 전문학회지 창간경험에 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입 첫해 저는 IFS만의 뚜렷한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먼저 전문학회지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공론화 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업과의 무리한 병행에 특히 큰 부담을 느낀 상당수 회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갈등의 중심에 서며 쉽게 동조자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힘들지만 20여명에 이르는 반대회원들을 맨투맨으로 만나 설득시켜 나가기로 했습니다. 타 학회와의 확실한 차별화만이 우수한 회원을 계속 유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며, 또한 대외적인 평판에서도 IFS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끈질기게 설득하였습니다.

결국 회원 모두로부터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 기획과 펀딩, 디자인까지 주도적으로 헌신한 끝에 창간호(IFS Insight+) 발간을 이룩하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제한된 시간과 부족한 인적자원의 험난한 과정이었지만, 갈등을 타개하는 지혜와 추진력의 중요함을 일깨울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Q3 기존에 해오던 방식과는 다른 아이디어나 방식을 생각/제안하거나 직접 시도해 본 경험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 (그것을 제안하거나 시도한 계기, 그때 느꼈던 감정이나 행동, 그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30 ~ 1,000자 이내]
A1
[매 순간을 성실하게]

경영학 전공을 살려 경리병으로 자원입대하면서 복무기간 동안 미래에 대해 심도 있게 내면을 성찰하리라는 야무진 각오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쁘고 반복적인 경리업무는 사고할 여력을 주지 않았고, 근무분위기 또한 생산적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일병 때 상급부대인 제2군단 군단장 당번병 후보자로 제가 선발되었고, 열두 명이 치른 치열한 면접 끝에 최종 선발되었습니다.

군단 비서실에서 수행했던 주 업무는 군단장 등 고위 장성의 일정을 계획하고 고위급인사의 영접전반의 일정을 지원하며, 때에 따라서는 수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업무는 생각한 것보다 매우 복잡하고 고된 것이었는데, 이는 순간순간의 정확한 판단력과 실행력을 필요로 했으며, 체계화되지 못한 방대한 양의 의전사례를 일일이 찾아보고 적용하기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수의 전역과 함께 제가 선임사병이 될 때까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감히 강구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제대를 1년 앞둔 시점, 저는 마침내 전역 전에 꼭 필요한 뜻 깊은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엄청난 양의 의전자료를 체계적으로 범주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이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를 누구나 쉽게 검색하여 적용할 수 있는 의전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특히 비서실장께 제 의도를 보고하였으나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일과시간이 끝난 후나 주말을 이용하여 끈기 있게 작업을 계속한 결과 제대 3개월 전 결국 내실 있는 시스템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제가 구축한 시스템은 타 부대에서도 활용할 정도로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았고, 군단장님으로부터 전역을 앞둔 군인으로서 흔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칭찬을 들었으며, 그 공로로 전역을 앞두고 군단장 특별표창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결국 성공에 이르게 한다는 저의 소신을 실천한 뿌듯한 경험이었습니다.
Q4 다른 사람과 함께 공동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했던 경험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 (일의 배경과 목표, 본인의 역할과 진행과정, 그때 느꼈던 감정, 어려웠던 점,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30 ~ 1,000자 이내]
A1
[소명감으로 역경을 헤치다]

종교의 의미를 탐색하고 성경 속에서 인문학적 자양분을 얻어보고자 대학시절 초 경영대 기독인 모임에서 1년간 활동하였습니다. 자아성찰이 부족한 탓에 아직도 종교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지만, 여름 방학 중에 다녀온 일주일 간의 카자흐스탄 봉사활동에 따른 각고의 경험은 아직까지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6개월마다 순환되는 차기 회장에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봉사활동 준비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국 하루 전 며칠 전부터 염증이 있던 엄지발가락 부분의 통증이 견딜 수 없도록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진단 결과 열흘 정도 안정을 취해야 하며 더욱이 국외 여행 등은 절대 삼가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았습니다. 결국 저는 봉사활동 참가를 포기하고 홀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불참함에 따라 봉사활동 지장이 큰 것은 자명하였기에 마음이 너무나 불편하였습니다. 출국 며칠 후 생각보다 발 상태가 호전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가 맡은 소임을 기필코 완수하고자 합류를 결심하고 현지와 연락을 취했으나, 낙후된 그 나라의 통신망 때문에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혼자의 힘으로 찾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3일 후에 출국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모임이 활동을 벌이는 곳은 카자흐스탄의 경제수도라 불리우는 알마티에서 기차로 11시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도시 침켄트입니다. 알마티 공항에서 현지에 연락해 본 결과 역시 연락이 되지 않아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영어가 잘 소통되지 않는 현지에 숙박을 하고 기차편을 타는 일은 신천지를 개척하는 것과 다름없는 험난한 일이었습니다. 1박 2일의 긴 여정 후 머나먼 목적지 침켄트에 어렵게 도착했을 때의 쾌감이란 형언할 수 없는 승리자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뜻 깊은 경험을 통해 조직활동에서의 개인적 역할의 소중함을 상기할 수 있었으며, 아무리 힘든 역경이라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Q5 자신의 소신, 원칙이나 기준을 지키려 하지만 상황적으로 지키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갈등을 겪었던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주십시오. (그때 상황, 느꼈던 생각과 감정,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30 ~ 1,000자 이내]
A1
[떳떳하지 못했던 보람]

다양한 전공 팀 프로젝트에서는 팀 기여도에 따른 동료평가를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간혹 불성실한 동료를 만날 때면 평가의 순간에 늘 내적 갈등을 겪곤 했습니다. 따라서 제가 팀을 리드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팀원 모두가 고루 역할을 담당하여 일을 완수하는 정직한 팀워크 정신이었습니다.

2013년도에 수강한 특수경영론 수업에서 활동초기에 팀원 한 명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팀 분위기를 매우 저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팀원에게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을 불편해했던 저는, 팀장으로서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동료평가를 할 수 있도록 각자의 역할 완수를 당부하였고, 문제의 동료를 개인적으로 만나 자기 몫을 다해줄 것을 설득하였습니다. 그 동료를 수시로 격려함과 동시에 어려운 역할은 제가 선뜻 자원하는 등 리더로서의 본분에 충실했지만, 그 동료는 결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등 끝까지 아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팀은 나머지 팀원들의 열정이 반영된 최선의 보고서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발표 시 교수님의 찬사를 받으며 최상의 학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비공개로 진행된 동료평가에서 저는 모든 발표 팀들 가운데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는 기쁨에 들떠, 낙오자에 불과하였던 문제의 동료에게 아주 관대한 평가를 내리는 우를 범했으며, 결국 그 동료를 포함한 우리 팀 전원이 최고학점을 취득하는 불합리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기분에 치우친 이러한 충동적인 모습은 팀 활동시 정직한 역할과 평가를 강조한 스스로에게 매우 떳떳치 못했던 행동이었는데, 그 후 그 동료에게 이메일을 통해 공정치 못했던 평가에 대한 저의 소회를 언급하며 변화를 촉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합격자소서 PD·연출

2013년 상반기 SBS 합격자 자기소개서 01

Q1 입사지원 동기[1000자 이내]
A1
[왜 예능 프로그램은 한류열풍이 없단 말인가]

“Ctrl C, V”는 예능 프로듀서의 필수조건이라는 말이 얼마 전까지 통용된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일본 프로그램을 자주 즐겨보던 저는 왜 한국의 프로그램이 일본의 프레임 속에서 카피 혹은 포맷의 미묘한 변경을 통해 컨텐츠를 도둑질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창작의 고통 못지않게 표절의혹의 모니터링을 피하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대한민국 PD분들에게 경외감과 더불어 안타까움이 일어났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는 적어도 남의 것을 손대진 않겠다’는 자신감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훗날 완전한 창조는 불가능하며 모방을 통한 재생산만이 트렌드를 따르는 중요한 방안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송제작은 참여했던 경험은 없지만 중고교시절 학생회장을 하면서 축제 및 다양한 행사를 기획 및 총괄하며 프로그램 제작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EBS방송국에서 저희 고등학교를 취재하면서 함께 기획을 짜고 학생과 스태프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경험은 제게 방송국 PD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매력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총학생회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인들의 대규모 축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기획했습니다. 조직을 재정비하고 홍보, 섭외, 무대, 지원부서등 TFT를 조직해 학우들에게 인상 깊은 축제를 선사했던 경험은 꿈을 향한 도약기였습니다.

사실 저는 방송프로그램 제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나타냅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도화지에 앞으로 그려나갈 다양한 경험들을 통하여 SBS가 원하는 예능 PD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100% 다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Q2 자신에게 주어졌던 일 중 가장 도전적이고, 어렵다고 느껴졌던 경험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일의 배경, 그때 느꼈던 감정, 어려웠던 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행동,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A1
[카메라만 없었을 뿐입니다]

연극영화과를 나온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 준하는 열정과 자부심을 한 때는 가졌었습니다. 저는 남들과는 다른 학창시절을 보냈었습니다. 중학교 3년간은 XX시 100m 육상대표 선수로, 고교 3년간은 연극부 생활을 하며 희극인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고교 2학년 시절, 한 선배가 학교폭력에 관련된 글로 XXXX문예에 당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느낌이 왔습니다. XX시 고교 연극제를 세달 앞둔 시기에 좋은 시나리오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선배의 동의를 얻어 몇 주간 각색을 통해 연극 대본을 만들었습니다. 법정을 주제로 한 30분짜리 단막극이었는데 이를 위해 3달간 강당에서 숙식을 하며 연극 자체를 즐겼습니다.

연극부 대표이자 기획자로서 담당 선생님의 암묵적인 야간자율학습 면제의 도움을 통해 열심히 준비해갔습니다. 소품부터 무대까지 직접 만들며 고교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갔습니다. 모교 축제에서 처음으로 시연을 한 후, 결국 OO시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열린 고교 연극제에서 심사위원들의 최고점을 획득하며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대학까지 이어져 ROTC 생활을 하기 전인 2학년까지 그 열정은 식지 않았었습니다. 전역 후, 직장생활과 유학준비를 통해 정신없이 달려오면서 방구석에 놓인 고교시절의 연극사진을 보며 다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PD가 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스터디원들과 함께 언론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Q3 기존에 해오던 방식과는 다른 아이디어나 방식을 생각/제안하거나 직접 시도해 본 경험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그것을 제안하거나 시도한 계기, 그때 느꼈던 감정이나 행동, 그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A1
[생각의 전환, Switch on]

대학시절 비운동권 총학생회 사무국장으로서 학교 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의 축제는 전국에서 가장 재미없는 축제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었습니다. 축제준비의 기획을 맡고 있는 저로서는 이러한 평가를 우리 대에서 끊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먼저, 축제 전담 T/F팀을 만들어 야심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기존 축제의 문제점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학우들의 소속감 부재, 단과대 집행여건 보장미흡 등의 문제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각 단과대의 학생회장들과의 회의를 통해 축제의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 후, 학우들이 가장 원하는 축제가 무엇인지 설문을 받아 전반적인 아웃라인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고질적인 문제는 학우들의 소속감 부재였습니다. 학우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하나”라는 컨셉을 최종으로 결정하고 외부업체를 섭외해 홍보를 다양화해 나갔습니다.

드디어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실무단을 교문에 배치해 함께 티셔츠를 나눠주며 관심을 유도했습니다. 티셔츠를 입은 학우에게는 학내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주자 자연스럽게 관심이 유도되었고 캠퍼스는 축제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찼습니다. 학우들이 원하는 강연을 위해 인기 연예인인 OOO을 직접 찾아가 섭외하였고 캠퍼스를 자유롭게 거닐게 하여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또한, 축제의 백미로 대학축제 사상 처음으로 번지점프를 설치해 직접 시범을 보이며 폭발적인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인기가수들을 무대에 올리며 멋지게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다양한 노력들을 통해 학우들의 단합을 이끌어 내었고 초록색 티셔츠는 지금도 학교를 물들이며 임기 후 가장 재밌고 혁신적인 축제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문제를 인식만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OO색 물결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입니다. 도전과 열정을 통한 실천력을 바탕으로 시청자의 안방에 웃음바이러스를 전파하겠습니다.
Q4 다른 사람과 함께 공동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했던 경험에 대해 기술하여 주십시오.(일의 배경과 목표, 본인의 역할과 진행과정, 그때 느꼈던 감정, 어려웠던 점,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A1
[Impossible is nothing]

사회생활의 첫 시작인 OO건설에서 건설현장으로 배치되어 “현장관리” 업무를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장관리는, ‘현장의 어머니’로서 경영학의 모든 분야를 실무에 직접 적용할 수 있었던 점에서 매우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직무였습니다.

저는 당시 도급액이 OOOO억이 넘는 2곳의 주택현장을 겸직했습니다. 저가수주에 관리미숙으로 원가율이 좋지 않았던 두 현장은 이미 적자를 넘어 원가율은 120%를 넘기고 있었고 공정율은 35%로 골조가 시작되는 단계로 원가투입이 앞으로 더욱 증가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건설경기 악화에다 대내외의 악재가 잇따른 상황에서 사업부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이 현장은 원가절감의 노력이 절실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장의 직원들의 의기투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재무담당으로서 제가 내린 해결책은 효과적인 자재수급을 통한 원가관리와 손익분석을 통한 경상비지출의 최소화였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현장을 돌아다니며 자재를 직접 관리하여 재고를 최소화하고 달성율을 확인했습니다. 1년간의 노력 끝에 두 현장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100% 원가율 달성으로 사업본부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었습니다.
Q5 자신의 소신, 원칙이나 기준을 지키려 하지만 상황적으로 지키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갈등을 겪었던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주십시오.(그때 상황, 느꼈던 생각과 감정,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시고 제목을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A1
[원칙은 대의를 위해 존재합니다]

제게는 가족보다 소중한 32명의 동생들이 있습니다. 사는 곳도, 생김새도 모든 것이 다 연관이 없는 저의 동생들은 국가를 위해 2년간 한 공간 안에서 지내며 다양한 추억들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육군 포병장교로 최전방부대에서 2년 4개월 복무했습니다. 군단 유일의 OO장교였기에 소대원들과 다양한 작전과 파견업무를 많이 수행했기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원칙을 갖고 소대원을 이끌어 나가며 할 땐 하고 놀 때는 화끈하게 노는 소대운영방침을 세웠습니다.

혈기 넘치던 초임장교시절 제 가슴을 아프게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전입을 온 신임 소위시절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대장에 관한 일입니다. 시 육상대표로 활동했던 저의 성향과 비슷하게 태권도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그 친구는 저와 성향이 잘 맞았습니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공치사를 하지 않는 남자다운 강인함을 좋아해 가까이 두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전입오기 전부터 소대에서는 이 친구의 폭정으로 인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결국 폭행사건이 터지고 사태가 심각해져 상부에 보고되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사태의 진화’냐 ‘영창’이냐, 소대원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아 엄하게 다그치며 수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항상 ‘가족’을 중시해왔던 제게 어떠한 결정도 위배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소대원들은 이미 그 친구를 영창보내기를 제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31명의 가족을 저버릴 수는 없었기에 ‘읍참마속‘의 심경으로 그 친구를 영창으로 보낸 후 타부대로 전출시켰습니다. 그동안 제가 강조한 ’우리는 가족‘이라는 원칙은 깨졌지만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혼자만의 원칙은 공염불이었습니다. 대다수가 공감하는 원칙, 이를 위해 자신의 신념도 포기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기획·전략·경영

SBS 2015년 하반기 신입사원 공개채용

  • # 지원동기
  • # 성취경험/보람
  • # 기타
  • # 조직/단체생활
Q1 입사 지원 동기
A1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다]
남들과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상파 방송 3사의 모든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챙겨 보던 중 어느 날, SBS에서 최초로 한 시간 앞당긴 8시에 뉴스를 방송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SBS에서 8시부터 9시, 타 지상파 방송에서 9시부터 10시까지 뉴스를 챙겨보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다른 방송사보다 한 시간 먼저 그날의 뉴스를 전해준다는 점이 인상 깊게 각인되었고, SBS의 8시 뉴스 덕분에 더 많은 시사 상식을 쌓고 세상의 흐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최근의 사회적 이슈와 쟁점을 심도 깊게 다루는 를 꾸준히 애청하며,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저는 SBS의 비전 슬로건인 “내일을 봅니다”에 발맞추어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방송을TV로만 접하지 않고, 모바일 장치를 통해 접하고 있는 시대에 놓여있습니다. 저는 이에 발맞추어 가고 있는 SBS의 보이는 라디오 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화 등의 스마트 기술의 선도를 지켜보며, 급변하는 방송 환경 속에서 다른 시청자들에게도 SBS를 통해 내일을 보는 지혜로운 눈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SBS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첨삭결과 이 글을 보면 마치 교양 PD에 지원했다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슬로건과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으로 이런 느낌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보이지만, 그뿐입니다. 또한 교양 프로그램을 보아 왔다고 하면서 '이렇듯 내일을 봅니다'라는 문구에 발맞췄다고 했는데, 이 연결 역시 약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지원분야가 경영이라는 부분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Q2 자신에게 주어졌던 일 중 가장 도전적이고 어렵다고 느껴졌던 경험에 대해 당시 배경, 감정, 어려웠던 점, 극복하기 위해 했던 행동,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십시오.
A1
[“하면 된다”는 신념의 실천]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하면서 가장 도전적으로 다가왔던 일은 미군 상사의 선입견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보직은 중대 본부에서 일등상사와 중대장을 보좌하는 것이었는데, 저희 일등상사는 처음 한국으로 전입을 와서, 자신의 중대에 타국인이 근무한다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는 눈치였습니다. 한국, 그리고 카투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모욕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차분히 마음을 먹고 가까이에서 일하는 제가 일을 잘 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의 선입견도 반드시 바뀔 것이라 믿었습니다. 저와 함께 근무하는 카투사 후임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남들보다 30분 먼저 출근하여 일하는 모습을 보이고, 손목을 다쳐 체력검정에 응시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하였으며, 언어장벽 극복을 위해 영어에 더 많이 노출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막사의 당직 부사관으로 근무하던 날이었습니다. 당직 사병을 맡고 있던 미군과 함께 막사 안팎을 깨끗이 청소해 두고, 당직 규정에 따라 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날, 일등상사가 막사에 불시 검문을 찾아왔습니다. 막사 청결 상태와 꼼꼼히 작성한 당직 기록을 보더니, 저를 크게 칭찬하면서 부사관들을 대상으로 당직 근무 방법과 당직 규정에 대해 특강을 할 생각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복잡한 절차로 인해 특강은 할 수 없었지만, 드디어 선입견을 바꿔냈다는 생각에 매우 뿌듯했습니다. 그 날 이후, 타 중대장이 저희 중대에 방문했을 때 저희 일등상사가 그에게, ‘카투사들이 당신 부대에 없다는 것은 큰 불운이다’ 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당시 언어장벽이 매우 큰 문제로 다가왔던 저에게 과연 가능할까 싶었던, 미군 상사의 선입견을 바꾸어 놓는 일은 상당히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로,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며 일을 해옴으로써 마침내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이 때의 경험은 저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으며,지금까지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습니다.
첨삭결과 좋습니다. 다만 청소로 인해 큰 칭찬을 받은 것인 만큼, 그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 됐으면 좋겠습니다.
Q3 자신의 소신, 원칙이나 기준을 지키려 하지만 상황적으로 지키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었던 경험에 대해 당시 정황, 느꼈던 생각, 일의 결과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으로 작성해 주십시오.
A1
[정직에서 신뢰로]
캐나다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기말고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곳의 기말고사는 3시간에 걸쳐 치르기 때문에 시험 도중 1명씩 화장실에 갈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곧 캐나다를 떠나야 했기에 친구들을 만나야 할 일도 많았고, 공부를 해야 할 양도 점점 쌓여갔습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친구 한 명이 저에게 다가와서 이 과목은 시험 족보에 나와있는 내용만 외우면 100점을 받을 수 있다며 그것을 건넸습니다. 그 과목만 준비할 수는 없어서 버거워하던 참에 들어온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양심을 속일 수 없었기에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시험 당일, 수월하게 처음 몇 문제를 풀다가 긴장을 너무 많이 했는지 화장실을 갔는데, 휴대폰으로 답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학생들을 발견했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부정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 말도 없이 강의실로 돌아와 계속 문제를 풀어 나갔습니다. 문제를 풀어나가던 도중, 마지막 두 문제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헤매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본 학생들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까지 제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아 자리에 앉아있었고, 끝까지 고민한 결과 정답을 써내려 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과목 시험 전날에는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가 시험 당일에 같이 앉아 모르는 문제를 공유하고 화장실에 번갈아 가서 답을 알아오자는 제안을 했었습니다. 저는 거절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시험 당일에는 혼자 앉아 문제를 풀어 나갔습니다. 시험 결과는 완벽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끝까지 정직함을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보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제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끝까지 정직함을 잃지 않았기에 저는 당당합니다. 좋은 성적을 받은 과목의 교수님들과는 친분을 쌓고 신뢰를 얻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꾸준히 정직함을 지키면 타인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인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첨삭결과 좋습니다. 양심을 끝까지 지킨 것이 굉장히 인상적인 에피소드입니다.
Q4 ‘창의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본인의 구체적 경험을 예로 들면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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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창의성의원천]
전공 수업인 ‘근대영국소설’ 과목을 수강하던 때의 일입니다. 학생 발표 위주로 이루어지는 수업이었고, 평가 항목에 ‘Creative Performance’ 가 있었습니다. 어떠한 형식이나 제약도 없이 그저 창의적으로 공연을 하는 것이 평가의 전부였습니다. 발표까지 주어진 시간은 2주. 같은 조를 이룬 친구와 저는 그저 막막해하며 머리를 싸매고 있었습니다. 앞선 학생들의 Creative Performance를 보니 노래를 개사하여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희도 노래를 하려고 하자니, 그저 진부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친구에게 소설 내용을 다시 파악하고,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전부 끄집어 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친구는 노래를 꾸준히 연습해와서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악기를 어렸을 때부터 배워 와서 다룰 줄 알았으며 또한 영상 편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통적으로는 한국 노래를 자주 듣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소설의 전체 흐름을 잡은 후 제가 자주 듣는 노래를 다시 듣다 보니, 가사가 저희 분량의 이야기 전개와 거의 유사함을 발견했습니다. 금상첨화로, 노래는 피아노 반주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원곡에서 플루트 편곡을 더하여 노래를 부른 후, 그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를 덧붙여 뮤직비디오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넘는 연습 끝에 영화 영상과 합쳐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냈습니다. 발표 당일에 저희는 교수님을 비롯한 학우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으며, 해당 과목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어 낼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진부한 ‘노래’만이 공연의 전체가 될 뻔 했지만, 저와 친구는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끌어 내어 ‘뮤직비디오’라는 작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각자가 노력을 해 온 분야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하나로 묶어냈더니,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는 노력만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창의성을 실천해 낼 수 있는 원천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첨삭결과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것을 어필했지만, 그보다 타 학생들의 개사가 대부분이라는 데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 있어 보입니다. 타 학생들의 시도는 삭제하고 좀더 창의적인 발상에 대한 강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Q5 본인이 속한 그룹에서 자신이 가장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했던 일의 과정, 결과 및 아쉬웠던 부분에 대한 개선책을 서술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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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과 전문성을 겸비한 리더로서의 준비 과정]
고등학교 때 신생 웹 기획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매년 10월에 동아리 경진대회를 주최하는데, 저희 동아리도 첫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 회의 차원에서 한 번 동아리 회원들이 모였는데, 그때 제가 프로젝트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대학 입시가 고등학생들 초미의 관심사인 만큼, 전 세계 모든 대학교의 입시 정보를 모아, 필요에 맞게 제공하는 웹 사이트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일사천리로 프로젝트 진행이 시작되었고, 저는 자연스레 프로젝트 총괄을 맡게 되었습니다.
총 동아리 구성원은 8명이었고, 우선적으로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팀을 나누어 조를 편성하여 웹 개발을 시작하였고, 저는 프로젝트 총괄과 함께 서버관리 분야에 몸을 담았습니다. 모두에게 익숙하지 않은 분야였기에 프로젝트 총괄자로서 동아리원들을 격려하며 이끌었습니다. 동아리 지원금 확보부터 시작해서 프로젝트 기간 동안의 고충 해결까지 모두가 제 몫이었기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했습니다. 그 결과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30만원의 지원금을 얻어내었고, 경진대회 전날까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낼 수 있었습니다. 동아리 구성원들의 피나는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경진대회 당일, 저희 동아리는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이듬 해 삼성동 코엑스에서 진행하는 청소년 창업 동아리 박람회에 저희 학교를 대표하여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기간 동안 모든 동아리원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려 노력했지만, 감히 제가 그렇게 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학업과 동아리 프로젝트 일을 병행하다 보니 수능 모의고사를 앞두고 바쁠 때면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타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많지 않아 다른 분야를 맡은 팀원들을 도울 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팀원들에게 신뢰를 받고 전문성을 갖춘 인재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첨삭결과 동아리원들을 어떻게 격려하고 이끌었는지를 써주세요. 어떤 방식의 리더십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Q6 최근 20년간 가장 혁신적인 발명의 결과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밝히고, 그것이 혁신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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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일등 공신, Wi-Fi]
스마트폰의 보급화가 이루어진 지는 아직 20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보급화는 세상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었고, 저는 스마트폰 보급화에 큰 역할을 했던 Wi-Fi가 숨겨진 일등 공신으로서 근 20년간 가장 혁신적인 발명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 보급화 이전과 그 초기에는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데이터 요금제에만 의존하여 인터넷을 사용해야만 했고, 노트북으로는 반드시 유선 랜(LAN)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인터넷은 Wi-Fi가 되는 곳이라면 모바일 기기로 어디든지 사용이 가능합니다. Wi-Fi 이전의 시대에는 모바일 기기 사용이 제한적이었다면, 지금은 공간을 초월하여 어디에서든지 인터넷 요금 걱정 없이 사용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 덕분에 모바일 기기의 대중화가 이루어져, 이제는 방송 시청이TV 뿐 아니라 노트북,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을 통해 어디서든 가능해졌습니다. 저는 한발 앞선 스마트 미디어 기술로 스마트 방송을 선도해가는 SBS에서, Wi-Fi 이후의 신기술과 함께 새로운 시대 또한 선도해 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첨삭결과 좋습니다. 이야기를 자신의 지원 업체인 SBS로 연결한 것도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한발 더 나가 경영하고도 연결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 새로운 시대를 선도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고 했지만,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는 다는 것은 수동적인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선도할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경영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