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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매거진

대체 왜 크리스 록을 싸고 도는 거지?

2022-04-01

최근 인터넷을 불태운 화제를 논하며 이 소동을 빼놓을 순 없죠. 지난 3월 27일(현지 시각)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도중, 래퍼이자 배우인 윌 스미스가 단상에 올라 행사 사회를 맡은 코미디언인 크리스 록의 뺨을 가격했던 사건입니다.

 

/Entertainment Tonight 유튜브 캡처

 

발단은 시상식 도중 록이 스미스의 아내를 언급하며 "G.I. 제인 2를 얼른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스미스의 아내인 여배우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이날 머리를 삭발한 채로 남편과 함께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자가면역질환을 앓으며 원형 탈모 증세가 발현되자 두발 전부를 아예 밀었던 것인데요. 록은 이를 영화 ‘G.I. 제인’ 여주인공이 입대 전 머리를 깎는 상황에 빗대며 농을 걸었다 합니다.

 

영화 ‘G.I. Jane’ 中/MUBI

 

청중의 웃음이 한바탕 지나고선, 무대 위로 올라서는 스미스의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록은 처음엔 스미스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장난스러운 투로 “이런, 리차드?(2021년 개봉작 '킹 리차드'에서 스미스가 맡았던 배역)”라고 말했는데요. 스미스는 대꾸 없이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록의 안면을 세차게 후려쳤습니다. 둔탁한 가격음이 장내에 온통 울려 퍼질 정도로 맹렬한 타격이었죠.

 

당시까진 록을 비롯한 참가자 대다수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일부는 이마저도 사전에 계획된 꽁트라 생각했는지 폭소를 터트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대본에 없던 돌발사태임을 누구보다 확실히 알았던 록마저도 미소를 띠며 “오 와우, 와우, 방금 윌 스미스한테 얻어터졌네요”라 말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그 직후 스미스가 “네 X 같은 주둥이로 내 아내 이름 부르지 마(Keep my wife’s name out your fxxking mouth)”라고 소리치자, 비로소 모두가 사태를 정확히 깨닫고선 웃음을 거두었습니다. 합의에 기반한 장난도, 미리 설계해 둔 연극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전원이 확실히 인지했던 것이죠. 록 또한 당황해서 “그건 ‘G.I. 제인’ 농담이었어요”라고 변명했으나, 스미스는 다시 한번 “Keep, my wife’s, name, out your, fxxking, mouth!”라 끊어 말하며 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록이 당해도 싸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폭력 자체를 옹호할 수는 없지만, 먼저 선을 넘은 쪽은 분명 록이라는 것이죠. 이견도 있기야 하겠으나, 동아시아 기준으론 남의 가족을 공개석상에서 대놓고 조롱하는 것은, 사실상 결투 요청 내지 선전포고나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서양에서는 반대로, 스미스의 행동을 야만으로 간주하며 규탄하는 목소리가 훨씬 높았습니다. 오히려 몰상식한 폭력에 노출됐음에도 의연한 대처를 보인 록이 진정한 인격자며 프로페셔널이라는 호평이 대세일 지경입니다.

 

이러한 문화권 사이의 극명한 온도 차에 네티즌 상당수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히 사건 초반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앓던 병이 ‘자가면역질환’이 아닌 ‘암’으로 와전되던 시기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어떻게 생사를 걸고 투병하는 이를 희롱한 작태를 옹호할 수 있냐며 분노하는 이가 많았죠.

인식차의 근원을 유럽 문화권에서의 ‘궁중 광대(Jester)’까지 거슬러 올라 찾는 이도 일부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선 연회장에서 일개 광대가 군주 일족을 대놓고 조롱하더라도 웃어 넘기는 풍조가 있었고, 그러한 전통이 현대 서구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이죠. 즉, 록의 농담에 격분해 손을 든 스미스는 제스터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목을 날려 버린 옹졸한 폭군이나 다를 바 없기에 비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필요 이상으로 거창한 감이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나라에도 똑같은 근거가 될 만한 사례가 적잖으니까요. 이를테면 지난 2005년 흥행작이었던 ‘왕의 남자’에도 비슷한 묘사가 있었고, 국민 대다수가 고교 과정에서 접했을 작품인 ‘봉산탈춤’에도 말뚝이가 양반을 조롱하는 장면이 한가득 나오죠.

 

영화 ‘왕의 남자’ 中/이글픽쳐스

 

사실 이런 식으로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열린 ‘서양에서의 큰 행사들’만 보더라도, 서구권 시민들이 이번 사태에 이토록 당황한 원인은 대략 짚어낼 수 있습니다. 사례 중 하나로 지난 2020년에 열린 제7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들 수 있는데요. ‘기생충’이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덕에 우리 국민 중에도 이 행사를 실시간으로 본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만. 당시 사회를 맡았던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리키 저베이스가 록의 농담이 애교로 보일 정도로 독설을 퍼부어 댔던 그 광경을 아마도 기억하실 겁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어린 여자 선호를 조롱했고, 애플 CEO 팀 쿡의 중국 현지 노동력 착취를 비판했고, 제임스 코든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캣츠’에 대해선 거의 욕설을 날렸죠. 총기 구매가 신용카드 발급보다 쉬운 나라인데 저러고도 길거리 다니기가 무섭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요. 참고로 저베이스가 놀림거리로 삼았던 이 인물들은 모두가 당시 골든 글러브 시상식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욕에 가까운 언사 전부를, 그들 면전에서 거침없이 쏟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미스처럼 단상에 올라 뺨을 날린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고요.

 

즉, 문화적 기원이고 자시고 간에, 애초에 현대 서양에선 공개 행사에서 이 정도 수위로 놀리는 것이 그다지 새삼스러운 수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서구권에서의 정확한 반응은 “아니, 윌 스미스처럼 이 업계에서 짬밥을 먹을 대로 먹은 셀럽이, 그러니까 무슨 상황인지 충분히 알 만한 양반이 뜬금없이 왜 저런 기행을 벌였대?”에 가까웠죠. 모두가 암묵적으로 ‘얼굴을 비춘 이상 그 정도 농담은 각오해야 한다’고 인지한 자리에서 혼자 사회적 동의를 깬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심지어 그 스미스마저 처음엔 록의 G.I. 제인 농담에 웃었다가, 옆에 앉은 아내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보고야 정색하고선 뛰쳐나갔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비판은 한층 더 거세졌고요.

 

물론 록의 농담을 무조건 싸고도는 것도 온당치만은 않습니다. 도를 넘는 비하에 불쾌를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 또한 결코 ‘사회적 용납’만을 명분 삼아 아주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니까요. 가령 록은 지난 2016년에 열린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도우미로 나선 아시아계 어린이 셋을 가리키며 “미래의 훌륭한 회계사가 될 분들을 소개합니다, 내 농담이 불쾌했다면 트위터에 올리세요, 물론 스마트폰도 이 아이들이 만들겠죠”라고 말했는데요. 아시아계는 수학을 잘하는 노동자라는 편견을 드러낸 동시에 그 지방에선 아동 착취도 거리낌없이 한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담아 논란이 됐었죠. 서양에서야 “우린 행사에서 이 정도 조크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그러한 행태를 좋게 볼 수만은 없는 저희의 심정도 존중받을 필요가 있음은 분명하죠.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시아계 아이들을 소재로 조크를 하는 크리스 록(오른쪽)./ABC

 

다만 이러한 제반 사정을 한껏 고려하더라도 ‘현장에서의 즉각적인 폭력’으로 대응한 것엔 문제가 있다 보는 이가 많기에, 아무래도 스미스 쪽이 욕을 더 먹고 있는 형편이긴 합니다. 설령 감정이 상했더라도 같이 말로 받아 치거나 행사를 마친 뒤 공식 입장으로 유감을 표하는 등,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논란이 불거지지 않을 방법은 얼마든 존재했다는 것이죠.

 

아무튼 향후 결론이 어떻게 나건, 이번 사태의 최대 수혜자는 록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장차 문제가 될 만한 농담을 하더라도 유쾌하게 수습할 레파토리가 하나 굴러들어온 셈이니까요. “오 이런, 제가 또 선을 넘었나 봐요, 저기 스미스가 뺨을 갈길 준비를 하고 있네요! 미안해요 지니! 맹세컨대 이번 농담은 제이다에게 한 것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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